본문 바로가기

작가 마당

한 사람의 글이 한 줄기로 이어집니다.

[수필] 어머니의 붉은 낯 (초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한결 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26-08-16 08:39

본문

읍내 은행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였다. 대기표를 뽑아 든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저마다의 순서를 견디고 있는데, 한 사내가 성큼 창구로 걸어가 서류를 내밀었다. 급한 일이 있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눈짓도 없었다. 직원이 난처한 얼굴로 대기 순서를 말하자 그는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바쁜 사람 붙들고 뭐 하는 짓이냐는 것이었다. 줄을 서 있던 노인 한 분이 혀를 찼지만, 사내의 얼굴에는 아무런 빛의 변화가 없었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저 얼굴은 왜 붉어지지 않는가, 그것이 궁금해서였다.

어머니는 낯을 잘 붉히는 사람이었다. 남의 집 마당에 잘못 들어간 닭 한 마리를 찾으러 가서도 연신 허리를 굽혔고, 이웃에게 빌린 함지박을 하루 늦게 돌려주던 날에는 미안해서 저녁 내내 말이 없었다. 어린 눈에는 그런 어머니가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세상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 같은데, 어머니는 늘 먼저 붉어지고 먼저 굽히는 쪽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을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를 믿었다. 낯 붉힐 줄 아는 사람의 말은 저울에 달아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도 잊히지 않는 붉음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구슬 몇 개를 주머니에 넣고 나온 적이 있다. 들킨 것도 아닌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귀가 뜨거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머니 속 구슬이 저희끼리 몸을 부딪치며 잘그락거렸다. 그 작은 소리가 온 동네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저녁상 앞에서 어머니가 무심코 내 얼굴을 보며 어디 아프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음 날 어머니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문방구로 향했다. 구슬을 돌려주러 가던 그 길, 세상 사람들이 다 내 얼굴만 보는 것 같던 화끈거림을 지금도 기억한다. 돌이켜 보면 그 뜨거움이 나를 가르쳤다. 훔치지 말라는 말 백 마디보다, 제 낯이 달아오르는 한 번의 경험이 더 깊은 스승이었다.

부끄러움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마음의 통증이라고 생각한다. 몸에 통증이 없으면 상처가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덧나듯,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제 허물이 곪는 줄도 모른 채 살게 된다. 아픈 것은 괴롭지만,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낯이 붉어진다는 것은 양심에 아직 피가 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부끄러움은 약함이 아니라 살아 있음이다. 잘못 앞에서 얼굴이 뜨거워지는 사람은, 적어도 제 안의 저울이 아직 녹슬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쩐지 붉어지는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 잘못이 드러나도 사과보다 변명이 먼저 나오고, 변명이 궁해지면 목소리가 커진다. 뻔뻔함이 당당함으로, 염치없음이 능력으로 대접받는 풍경도 낯설지 않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 같은 시절이다. 얼굴이 두꺼워야 살아남는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 처세가 된 세상에서, 붉어지는 얼굴은 점점 귀한 것이 되어 간다.

여기까지 쓰고 나는 잠시 손을 멈춘다. 남의 몰염치를 헤아리는 일은 이토록 쉬운데, 정작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낯을 붉혔던가. 은행에서 만난 그 사내를 나무랄 자격이 내게 있는가. 약속 시간에 늦고도 길이 막혔다는 말부터 꺼내던 날, 내 잘못이 분명한 자리에서 상대의 허물을 먼저 들추던 순간, 마음에도 없는 말로 그 자리를 모면하던 저녁. 그때마다 나의 얼굴은 붉어지지 않았다. 어린 날 구슬 몇 개에 귀까지 뜨거워지던 아이는, 나이를 먹으며 변명의 기술만 늘었는지도 모른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앉았는데, 쓰다 보니 이것은 결국 내 이야기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낯가죽이 두꺼워지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그 반대이기를. 젊어서는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다면, 이제는 들키지 않아도 부끄러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보는 눈이 없는 자리에서 저 혼자 낯을 붉히는 사람, 제 허물 앞에서 남보다 먼저 뜨거워지는 사람.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었다. 낯 붉힐 줄 아는 사람의 말에는 저울이 필요 없다.

그날 은행을 나서며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붉어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이 조금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이상하게도 조금 다행스러웠다. 내 안 어딘가에 어머니의 붉은 낯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 이곳에 실린 글은 작가가 책으로 엮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원고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