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작가 마당

한 사람의 글이 한 줄기로 이어집니다.

[수필] 나를 지키는 다정한 거리 (수정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한결 댓글 0건 조회 52회 작성일 26-08-07 15:29

본문

시계를 십 년 전쯤으로 돌려 본다. 그 무렵 나는 전화번호부에 이름이 넘치도록 많은 사람이었다. 타인의 기분을 헤아리고, 마음을 스치고 가는 온갖 불편한 감정을 다독이며, 무수한 관계의 그물을 놓치지 않고 붙드는 것만이 성숙이자 인격이라 믿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계절인가, 문득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의 잔고가 서서히 바닥나고 있다는 것을.

겉으로는 풍성해 보이던 인맥의 그늘 아래서 정작 내게 돌아온 것은 묵직한 피로와 갈수록 깊어지는 갈증뿐이었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가시 돋친 말 한마디가 가슴에 얹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기운을 앗아 가는 만남이 되풀이될수록 내 안의 온기는 조금씩 식어 갔다. 그것은 삶을 풍요롭게 사는 일이 아니었다. 타인의 불쾌함을 받아 내는 그릇으로 나를 내어놓는 일이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관계의 가지를 쳐 내기 시작했다. 마음을 짓누르고 감정을 소모시키는 인연을 하나씩 삶의 테두리 밖으로 정돈해 나갔다. 익숙한 끈을 자르는 일은 처음에는 얼마간의 두려움과 자책을 데리고 왔다. 내가 너무 야박한 것은 아닐까. 타인의 허물조차 품지 못할 만큼 내 그릇이 좁은 탓은 아닐까. 자기 의심이 꼬리를 물었다. 지금도 이 방식이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지혜라거나 흠 없는 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품이 좁다고 나무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 또렷해진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차가운 배척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지키기 위한 지극히 본능적인 몸짓이었다는 점이다. 나무가 이듬해 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병든 가지를 잘라 내듯, 내 마음이 숨 쉴 자리를 트기 위해 그은 최소한의 금이었다. 관계를 정리한 뒤에 찾아온 평안과 고요는, 그 관계를 억지로 붙들어 두느라 치러야 했던 값과는 비할 수 없이 깊었다.

물론 세상을 살면서 모든 인연을 칼로 두부 베듯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터나 맡은 자리로 엮인 이들과는 어쩔 수 없이 날마다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마음이 통하지 않고 때로 묵직한 불편함을 주는 이들과 한 공간에 머물러야 할 때, 나는 예의라는 투명한 울타리를 세운다. 상대를 비난하거나 밀어내지 않되, 내 마음의 깊은 안방까지는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거리를 두는 것이다. 적당한 미소와 정중한 말씨,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된 몸가짐. 그 선을 지킴으로써 나는 내 마음의 안뜰을 지킨다. 예의란 타인을 향한 기본의 배려인 동시에, 내 평정이 흔들리지 않게 감싸 주는 다정한 울타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깊은 교류나 지나친 기대는 가만히 거두어들이되 최소한의 정중함으로 마찰음을 줄이는 것, 그것이 내가 뒤늦게 익힌 살림의 기술이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내게 남은 시간과 기운을 어디에 모아야 할지 비로소 깨달아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인 풍경을 바랐다. 그러나 세월이 가르쳐 준 것은, 무수한 박수보다 내 삶의 결을 가만히 알아주는 눈길 하나가 훨씬 귀하다는 사실이었다. 겉치레로 이어지는 관계의 수풀 속에서 길을 잃기보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말 한마디에 마음이 온전히 닿는 몇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넉넉하다.

침묵조차 어색하지 않은 사람. 못난 모습이나 속엣말을 털어놓아도 저울에 달지 않는 사람. 그저 있어 주는 것만으로 마음의 짐을 덜어 주는 사람. 그런 이들과 마주 앉아 따뜻한 찻잔을 기울이는 시간이 지금의 나를 받치는 가장 튼튼한 기둥이다. 여러 사람과 얽혀 나를 닳게 하는 대신, 결이 맞는 몇 사람과 소소한 온기를 나누며 사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곱게 늙어 가는 삶의 모습이다. 주름이 깊어지고 머리칼이 희어지는 동안, 마음속에 원망이나 억지로 붙든 관계의 찌꺼기를 남겨 두고 싶지 않다. 내게 허락된 시간을, 진정으로 아끼는 이들과 나 자신에게 온전히 쓰고 싶다.

내 인맥의 지도는 이전보다 단출해졌다. 그러나 내 마음의 정원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나를 지키기 위해 들었던 가위는 차가운 거절이 아니라, 내 삶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한 다정한 선택이었다. 오늘 밤도 나는 마음이 통하는 몇몇의 이름을 가만히 읊조려 본다.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이름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짧은 명단이 예전의 두꺼운 전화번호부보다 든든하다.

※ 이곳에 실린 글은 작가가 책으로 엮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원고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