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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우리의 이타카를 묻다 (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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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한결 댓글 0건 조회 41회 작성일 26-08-10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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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가 사라진 극장에서

주일 저녁 아홉 시 오십 분, 논산의 작은 상영관. 서늘한 밤공기를 밀고 들어가 앉으니 화면 가득 검푸른 지중해의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아. 삼천 년 전 호메로스가 노래한 서사시를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빚어낸 작품이었다. 지친 눈빛의 오디세우스, 이십 년의 기다림을 견디는 페넬로페, 아버지를 찾아 나선 아들 텔레마코스. 인물들의 얼굴 위로 번지는 푸르스름한 불빛이, 곁에 앉은 아내의 옆얼굴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호메로스의 원작은 본래 신들의 세계다. 인간의 운명은 올림포스의 회의에서 결정되었고, 바다의 풍랑은 포세이돈의 사사로운 분노였으며, 절망의 순간 찾아오는 지혜는 여신의 속삭임이었다. 고대 사람들에게 신화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설명하는 유일한 질서였고 삶의 전부였다. 오디세우스가 거친 풍랑 속에서도 십 년을 버티며 고향으로 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가야 할 이타카가 그저 고향 땅이 아니라 신이 정해 둔 영원한 목적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란이 펼쳐 놓은 세계는 신화라기보다 묵직한 인간의 이야기에 가까웠다. 영화는 초월적인 신의 권능을 자연의 법칙과 인간 내면의 힘으로 바꾸어 놓는다. 신의 기적 대신 인간의 집념이, 신의 진노 대신 가혹한 자연과 고독이 화면을 채운다. 신화가 인간 너머의 거대한 무엇을 말한다면, 오늘의 이야기는 인간 안쪽의 마음을 좇는다. 그렇게 신화가 사라진 자리에서, 영화는 신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인간의 가슴속에 들여놓고 있었다.

영화가 깊어질수록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우리가 참으로 신화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왔기 때문이다. 과학과 이성은 세상의 신비를 하나하나 풀어헤쳤고, 신비가 떠나간 자리에는 차가운 법칙과 숫자만이 남았다. 세상은 밝아졌는데, 어쩐지 그 밝음이 쓸쓸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는 신화가 사라진 자리에 겨우 세워 둔 저마다의 이야기마저 잃어가고 있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 쫓기느라,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묻는 물음은 설 자리를 잃었다. 오디세우스처럼 거창한 여정은 아닐지라도 저마다의 가슴속에 흘러야 할 삶의 물줄기가, 고단한 쳇바퀴 아래서 납작하게 눌리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신화도, 나만의 이야기도 닳아 버린 채 그저 살아남기 위해 하루를 써 버리는 우리들의 얼굴이 스크린 위에 겹쳐 보였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의 얼굴이기도 했다.

영화의 막바지, 온갖 시련을 지나 누더기를 걸친 채 마침내 고향 이타카의 흙을 밟는 오디세우스의 발걸음 위로 깊은 정적이 흘렀다. 오래 기다려 온 페넬로페와 마주 서는 그 순간, 나는 옆자리의 아내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아내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옆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도 저만의 파도를 건너 여기까지 왔구나.

우리는 신화 속 영웅처럼 바다 괴물과 싸우지 않는다. 그러나 매일 아침 생계의 짐을 지고 집을 나서고, 팍팍한 날들 속에서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다가올 날의 불확실함에 흔들리면서도 서로를 의지해 오늘이라는 풍랑을 건넌다. 그러니 신화도 저마다의 이야기도 희미해진 이 시대에, 우리를 버티게 하는 이타카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스크린 속 삼천 년 전의 바다와 논산의 밤이 한 줄로 이어지는 듯했다. 거대한 신들의 시대가 저문 뒤, 우리는 거룩함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놓았다. 이제 우리의 신화는 하늘의 신전이 아니라 지상의 성실한 삶 속에 있다. 지친 하루 끝에 마주 보는 서로의 체온,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정직하게 견뎌 내는 사람을 향한 애틋함. 그런 것들이 밥벌이에 눌린 우리의 하루에 다시 이야기를 돌려준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고, 함께 돌아갈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은 이미 하나의 서사다.

상영관의 불이 켜지고 심야의 극장을 나서자 논산의 밤공기가 서늘하게 피부에 닿았다. 아내와 나는 말없이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신화는 사라졌고 저마다의 이야기마저 흔들리는 세상이지만, 돌아갈 곳을 향해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걸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이타카인지도 모른다. 파도는 오늘도 치겠지만, 잡은 손은 놓지 않을 것이다.

※ 이곳에 실린 글은 작가가 책으로 엮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원고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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